여행은 단순한 소비 활동일까요? 아니면 한 지역을 존중하고 배우는 과정일까요? 최근 몇 년간 여행의 의미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속가능한 여행’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면서, 대규모 소비 중심의 관광보다는 지역 공동체와 상생하는 로컬투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실제로 경험한 제주도 구좌읍의 마을 여행을 사례로 삼아, 지역과 여행자가 공존할 수 있는 여행 방식에 대해 탐색해 보겠습니다.
대규모 관광의 그늘, 마을은 사라지고 있다
제주도 성산일출봉 인근의 어느 마을에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원래 농촌 마을이었지만, 몇 년 사이 숙소와 카페, 렌터카 업체들로 가득 차며 원주민의 삶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편의점 앞 평상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죠. “살기는 좋아졌는데, 우리는 어디 가서 살아야 하는 거냐고.”
관광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원주민의 삶, 문화, 풍경 자체가 관광 자원으로 소비되며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게 됩니다. 집세는 오르고, 땅값은 치솟고, 결국 주민은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는 겁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지역 중심의 여행 설계’입니다. 여행자가 지역의 경제를 단기적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느슨하게 연결되고 기여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을까요?
구좌읍 로컬투어: 마을과 나의 조용한 만남
작년 여름, 저는 제주 구좌읍에서 진행하는 ‘로컬트립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이 여행은 마을 주민이 직접 해설자가 되어 걷는 투어였고, 대형 관광버스도, 인플루언서도 없었습니다. 참가자는 고작 6명. 우리는 그 마을에 살고 있는 70대 어르신과 함께 옛 염전터를 지나, 예전 바닷길이었던 돌담길을 걸었습니다.
가이드북에는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졌습니다. “저기 보이는 나무는 1960년 태풍 때도 안 넘어졌어. 그래서 우리가 이걸 ‘마을 지킴이’라고 불러.”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의 풍경이 단순한 나무와 돌담이 아닌 시간의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지역 주민이 만든 간식도 먹었습니다. 밀감청에 절인 감귤피, 고구마로 만든 전통과자, 마을 텃밭에서 난 채소들. ‘여행지의 맛’이 아니라 그 마을의 일상을 맛보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SNS에 그 어떤 사진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너무 소중해서, 조용히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행자의 역할: 소비자가 아닌 참여자로
기존의 여행은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여행은 반대로 묻습니다. ‘내가 이곳에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로컬투어의 사회적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겨납니다. 단순히 숙소나 관광지를 이용하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여행자는 지역의 역사, 문화, 생태에 공감하고 연결되는 참여자가 됩니다. 예를 들어, 구좌읍에서는 로컬투어 수익 일부가 마을 발전기금으로 자동 환원됩니다. 주민 해설사에게 정당한 임금이 지급되고, 마을 식당에 수요가 돌아가고, 그 흐름이 다시 마을을 유지시키는 구조입니다.
물론 로컬투어는 불편합니다. 시간표가 유연하지 않고, 시설도 소박하며, 관광지처럼 포토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느림과 부족함 속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여행, 관계 중심의 여행을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여행의 방식은 더더욱 지역과 연결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는 것’보다 ‘머무는 것’, ‘찍는 것’보다 ‘듣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지속가능한 여행이란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지역을 존중하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일상 속으로 잠시 들어가는 여행이면 충분합니다. 로컬투어는 단지 조용한 여행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발 디딘 여행지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라는 걸 기억하고, 소비보다는 관계를 남기는 여행을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요? 다음 여행에서, 지도에 없는 작은 마을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뎌 보세요. 그곳에는 여러분만의 진짜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