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변에서 피한 폭염의 하루 (제주도, 해수, 바람)
2025년 여름, 전국 대부분 지역이 37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 저는 무작정 제주로 향했습니다. 목적은 단순했습니다. 가능한 한 시원하고, 조용하며, 사람 많은 해수욕장은 피하자는 것. 이번 여행은 화려한 관광지보다, 바람이 부는 해변 한켠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하루는, 생각보다 더 깊고 시원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공항이 아닌 바람을 먼저 마주한 제주
김포공항을 빠져나와 비행기에 오른 시각은 오전 8시였습니다. 당일치기를 목표로 한 짧은 일정이었기에, 시간은 한 시간이라도 아껴야 했습니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를 수령하고 곧장 서쪽 해안을 향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함덕이나 협재로 몰리는 시간대였지만, 저는 평소 눈여겨보던 ‘곽지과물해변’보다 더 북쪽에 있는 작은 포구 근처를 목적지로 삼았습니다.
차를 멈춘 곳은 해안도로와 이어진 너른 주차장이었고, 주변에는 카페도,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단 하나, 바다와 직면한 작은 파라솔 몇 개만 놓여 있었습니다. 그곳에 앉아 바람을 맞는 순간, 에어컨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바다의 냉기가 피부에 바로 닿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심의 폭염이 얼마나 숨 막히는 것인지, 그제서야 알 것 같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햇살을 피하고자 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햇빛마저 환영받을 정도로 바람이 셌고, 마른 듯 시원했습니다.
관광 없는 여행, 그 자체로 충분했던 이유
물놀이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늘진 곳에 앉아 미리 준비한 책 한 권을 펼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텀블러를 옆에 두었습니다. 몇 장 읽고 고개를 들면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간간이 지나가는 바람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변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SNS에 올라오는 사진을 따라 다른 곳으로 향했을 테니까요. 저는 오히려 그런 고요함이 좋았습니다.
점심은 해안도로를 따라 조금 더 이동해 서호동에 있는 현지 식당에서 먹었습니다. 메뉴는 생선조림이었고,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한 대가 돌아가는 공간이었지만 식사 내내 불쾌한 느낌 없이 기분 좋게 땀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갑자기 내린 해무 덕분에 바다는 온통 뿌옇게 변했습니다. 그 순간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그저 해변가 의자에 앉아 뿌연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돈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느려졌던 하루의 끝
저녁 무렵이 되자 바람은 더 부드러워졌고, 노을은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러 유명한 일몰 명소는 피했습니다. 대신 애월읍과 한림 사이, 지도에도 명칭이 없는 포인트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었습니다.
차박용 의자를 꺼내 앉고 나니, 그제서야 비로소 시간이 느려졌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도, 지금 이 시간을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이, 그저 눈앞의 노을과 시원한 공기만 있었습니다.
그날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귀경 전 공항 근처의 오일장 부근 포장마차였습니다. 차가운 전복물회 한 그릇과 함께한 그 자리에서, 저는 오늘 하루를 처음으로 요약해봤습니다. 아무런 일정도 없이, 그저 시원한 공기와 함께한 시간. 몸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마음은 너무도 가볍게 정돈된 하루였습니다.
바람 하나로도 충분했던 하루
제주도의 여름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단단했습니다. 유명한 관광지를 돌지 않아도, 이름난 맛집을 찾지 않아도, 단지 바람 부는 해변 한 곳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이번 여행은 ‘폭염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시작됐지만, 그 안에서 저는 스스로를 쉬게 하는 법을 다시 배운 것 같습니다. 에어컨도, 그늘도, 냉수도 아닌, 자연이 주는 바람과 온도로 체온을 낮추는 하루는 꽤 특별했습니다.
무계획이었기에 더 선명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여유. 어쩌면 여름이란 계절은, 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한 계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