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에 도착한 것은 새벽 5시 20분, 해가 뜨기 직전이었습니다. 기차는 조용히 정동진역에 멈췄고, 저와 몇 명의 승객만이 플랫폼에 내렸습니다. 겨울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쳤지만, 마음은 오히려 따뜻해졌습니다. 차창 밖에서 점점 밝아오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을 때,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모든 것이 선명해졌습니다. 그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제 마음을 위로하러 떠나온 ‘회복의 여정’이었습니다.
저를 울린 새벽의 해돋이
정동진 해변은 그 이름만큼이나 동쪽에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기차로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하는 역, 그곳에서 저는 생애 처음으로 ‘해돋이를 보며 울었습니다.’ 하늘이 서서히 분홍빛으로 물들고, 수평선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저는 그 조용한 환호 속에서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어제의 저, 상처받았던 저, 지쳐 있었던 저를 햇살이 말없이 끌어안아 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누가 알았을까요. 정동진의 새벽이 제 인생을 위로해 줄 거라고는요.
기차와 바다가 만나는 풍경
정동진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바다와 기차가 나란히 달리는 장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철로 옆 산책길을 걸으며 저는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았습니다. 기차가 바다와 거의 붙어 달리는 풍경은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따뜻했습니다. 제 안에 쌓여 있던 무거운 감정들이 기차의 흔들림 속으로 실려 떠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다 철길 옆 벤치에 조용히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기차 소리,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 모든 것이 조용한 위로처럼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모래시계 공원
정동진에는 모래시계 공원이 있습니다. 드라마 <모래시계> 촬영지이자, 지금은 시간을 주제로 한 여행자들의 명소입니다. 저는 거대한 모래시계 앞에 가만히 섰습니다. 초단위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지금 내 시간을 잘 살아가고 있는가?’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 앞에 서 있는 동안 제 마음속 무언가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래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저는 오히려 저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동진에서 만난 소박한 삶
해변 옆 작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조용히 미역국과 고등어구이를 내주셨습니다. 식당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갓 지은 밥 냄새가 어우러진 풍경은 어디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감성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요즘엔 사람들이 좀 늘었어요. 혼자 오는 젊은 친구들도 많아요.”라고 하시며 저에게 따뜻한 차도 내어주셨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드렸습니다. “혼자 왔다가, 혼자 위로받고 가요.” 그 말에 할머니는 말없이 웃으셨습니다. 정동진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묻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고, 그저 따뜻하게 안아주는 곳.
여운이 남는 여행, 돌아오는 길에 저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저는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정동진을 떠난다는 건 아쉬움이 아니라 한 편이 채워졌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사람은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무작정 떠난 길 끝에서 진짜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정동진은 제게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바다, 기차, 해돋이, 모래시계, 그리고 조용한 위로. 저는 이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할 것입니다. 그날, 그 바다 위로 올라오던 햇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