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두통이 생기고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고 싶었고, 도시가 아닌 어딘가에서 멈추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고른 곳이 전남 화순이었습니다. 이름만 몇 번 들었고,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으며 지인이 여행지로 추천한 적도 없던 그곳. 오히려 그래서 더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제가 화순에서 우연히 발견한 식당, 실제로 걸었던 유적지, 그리고 예상외로 정말 좋았던 숙소에 대한 재밌는 기록입니다. 지금부터 아름다운 화순으로의 여행을 떠나 보실까요?
역사와 시간이 공존하는 길 위에서 (유적지)
초등학교 때 학교수업에서 배웠을 때 화순은 ‘고인돌’로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정작 제가 가장 깊게 느낀 역사의 흔적은 쌍봉사 가는 길목의 고택 거리였습니다. 첫날 아침, 터미널 근처에서 자전거를 빌려 무작정 외곽으로 나섰습니다. 네이버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조용한 시골길이었는데, 가다가 이정표 하나를 보았습니다. “쌍봉사 2km”. 길 양쪽엔 기와지붕이 깔린 고택들이 있었고, 돌담 사이로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역사' 같았습니다. 관광객은 없었고, 그 적막이 오히려 공간을 더 웅장하게 느끼게 해 줬습니다. 쌍봉사에 도착했을 땐 대웅전 뒤편에서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사찰보다도 그 주변을 걷는 시간이 더 좋았습니다. 저는 길에서 역사를 느낍니다. 누가 안내하지 않아도, 말없이 설명해 주는 풍경이었습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간 식당 (맛집)
화순읍에서 구시가지 쪽으로 걷다 보면 시장 옆에 작은 분식집이 하나 있습니다. 간판도 지워져 있었고, 안을 들여다보니 아주머니 한 분이 만두를 빚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냥 그 풍경에 이끌려 분식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김치만두 있어요?” 하고 묻자, “직접 담근 거라 맵긴 한데 괜찮겠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나온 김치만두는 생각보다 훨씬 매웠지만, 훨씬 맛있었습니다. 만두를 다 먹을 즈음 아주머니가 국수를 한 그릇 덤으로 내주셨는데, 멸치 육수에 콩나물과 다시마가 들어간 국물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요즘 애들은 이런 국물 안 좋아하지?”라며 웃으셨지만, 저는 그 국물 때문에 며칠 지나서도 그 집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그 식당을 ‘시간이 멈춘 집’이라 부르게 됐습니다. 위치도 애매하고, 검색도 안 되지만, 제 기억에선 그 어떤 맛집보다 맛있었던 분식집으로 기억됩니다.
기억은 흐릿한데 아늑함만은 또렷이 남아있는 곳 (숙소)
숙소는 화순군 화순읍 외곽의 민박집을 골랐습니다. 이른 오후에 체크인을 했는데, 주택을 개조한 형태였고, 정원엔 작은 연못과 장독대가 많이 있었습니다. 집주인아주머니는 “혼자 여행 오셨어요? 화순에 올 줄은 몰랐네요” 하시며 의아해하셨습니다. 방 안에는 잡지책과 먼지 낀 책들이 여러 권 있었고, 뜻밖에도 산울림 2집 앨범도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어두고 볼륨을 작게 틀어두자,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함께 그 음악이 방안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날 밤, 저는 방 안 테이블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책을 읽고 뜨개질을 하며 일기도 썼습니다. TV도 끄고, 폰도 꺼버리고 말입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어떤 숙소는 서비스가 기억에 남고, 어떤 숙소는 뷰가 남는데… 그 집은 ‘공기’가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도 가끔 그 방에 눕는 꿈을 꾸곤 합니다.
화순은 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깊게 기억에 남는 곳입니다. 유적지에선 관광객 없는 고요 속에서 역사를 느꼈고, 식당에선 익숙하지만 낯선 정과 따뜻함을, 숙소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누군가에겐 그저 지나가는 시골일지 모르지만, 저에겐 ‘멈춤의 미학’을 가르쳐준 진짜 여행이자 힐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화순이라는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바로 그 이유로 한번 가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