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면 이상하게 입맛이 뚝 떨어집니다. 냉장고를 열어도 뭘 먹고 싶은지 모르겠고, 가스 불 앞에 서는 게 싫어 그냥 대충 찬물에 밥만 말아먹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오이무침을 꺼내 먹습니다. 간단하지만 기분을 살려주는, 여름이 되면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음식. 이 글은 내가 매년 여름마다 반복해서 만들어 먹는 오이무침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오이는 그냥 오이가 아니다 — 기억을 씹는 식재료 (재료 선택)
마트에 가면 싱싱한 오이가 한 봉지에 3~4개씩 들어 있습니다. 나는 늘 망설이다가 한 봉지를 집습니다. 다 못 쓸 걸 알면서도, 여름 오이는 버리기가 아깝습니다. 껍질이 얇고 탱탱한 그 촉감은 손끝에서부터 시원합니다. 내가 오이무침을 좋아하게 된 건 엄마의 영향이 큽니다. 어릴 적 여름이면 엄마는 아침에 미역국을 끓이고, 꼭 오이무침을 곁들였다. “더울 땐 차가운 게 최고야”라며, 소금에 절인 오이를 조물조물 무치던 엄마의 손. 지금은 내 손이 그렇게 움직입니다.
나는 오이를 세로로 반 가르고, 숟가락으로 속 씨를 긁어냅니다. 씨까지 같이 무치면 물이 생겨 빨리 상하니까. 오이 하나를 어슷썰기 하고, 소금 약간을 뿌려 10분쯤 절입니다. 이게 첫 번째 과정입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단순한데, 이 절이는 시간이 맛을 좌우합니다. 너무 오래 두면 흐물 해지고, 너무 짧으면 아삭함이 덜합니다. 그 중간을 찾는 건 오로지 손의 감각입니다.
비율보다 중요한 건 감각이다 — 조물조물 기술 (무치는 과정)
오이에서 물이 적당히 빠졌다면, 깨끗이 헹구고 물기를 꼭 짜냅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짜낸 손의 힘’입니다. 양념은 매번 같지 않습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바뀝니다. 어떤 날은 고춧가루를 넉넉히 넣어 매콤하게, 또 어떤 날은 식초를 조금 더 넣어 새콤하게 만듭니다.
고춧가루 한 숟갈, 식초 반 숟갈, 설탕 반 숟갈, 다진 마늘 약간, 참기름 한 바퀴, 들깻가루 약간. 가장 중요한 건 ‘조물조물’이다. 그냥 섞는 게 아니라, 재료와 내가 대화를 나눈다는 느낌으로. 오이가 양념을 거부하지 않게, 억지로 비비지 않고 천천히 버무린다. 어떤 날은 양념이 모자란 것 같아도 굳이 더하지 않는다.
오이가 스스로 간을 흡수하는 시간도 있어야 하니까. 내가 이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뭔가를 억지로 조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대충 만들었는데도 맛있고, 정성 들이면 더 맛있는 그런 요리. 오이무침은 내게 그런 존재다.
입맛 살리는 건 단맛보다 식감이다 — 먹는 순간의 느낌 (서빙과 응용)
완성된 오이무침을 접시에 담으면, 색감부터 여름스럽습니다. 초록과 붉은 고춧가루, 거기에 살짝 윤기 도는 참기름이 입맛을 자극합니다. 나는 이걸 밥 위에 얹어 먹기도 하고, 삶은 계란 옆에 반찬처럼 두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그냥 국물 없이 밥에 쓱쓱 비벼 먹기도 합니다. 의외로 김치보다 자극적이지 않고, 입 안에서 아삭하고 시원하게 씹힙니다. 예전엔 이 오이무침이 그저 반찬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름이 되면 이 무침이 나를 여름으로 끌고 갑니다. 아삭한 그 식감이 입안에 퍼지면, 바람 없는 부엌에서도 잠시나마 시원한 느낌이 돕니다. 그 순간, 여름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생깁니다. 오이무침을 먹는 건 단지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여름을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덥지만 살아보자’는 식의 작은 선언 같은 느낌.
요즘은 유튜브에 오이무침 레시피만 해도 수백 개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 오이무침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손맛과 기억, 그리고 그날그날의 기분으로 완성되는 한 그릇. 여름엔 거창한 음식이 필요 없습니다. 오이 하나면 충분합니다. 입맛이 없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그냥 조용히 오이 하나 썰어 조물조물 무쳐봅시다. 그 한 접시가 의외로 나를 살게 합니다. 당신의 여름 식탁에도 오이무침 한 접시, 놓여 있길 바랍니다. 간단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음식. 여름은 그렇게 견뎌지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