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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속도에 맞춘 여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

by love6967 2025.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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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속도에 맞춘 여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 거북이

 

 

우리는 보통 ‘빠르게 다녀오는 여행’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다녀온 여행은 조금 달랐습니다. 목적지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의 ‘식물 관찰 코하우징 마을’. 이 마을에서는 하루 일정을 ‘사람의 시간’이 아니라 ‘식물의 속도’에 맞춰 운영합니다. 처음엔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그 속에서 저는 ‘여행’이 아니라 존재 방식 자체를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글은 일반적인 여행 팁이 아닌, 정지된 자연 속에서 인간이 어떤 감각을 회복하는지에 대한 경험 보고서입니다.

여행 일정표가 없는 마을에 도착하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고속도로를 벗어나 숲길을 40분 정도 더 들어가야 나타나는 작은 마을, 이곳은 ‘식물 리듬 코하우징’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실험적 공동체입니다.

제가 이 마을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식물의 시간에 맞춰 사는 3일간의 여행 프로그램’ 때문이었습니다. 체크인 시간도 없습니다. 도착한 순서대로, 마을에 ‘조용히 흡수’되면 됩니다.

첫날은 일정표도, 지도도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안내판에 적힌 건 단 한 문장뿐. “이곳의 시간은 당신이 보는 나뭇잎의 움직임에 따라 흘러갑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습니다. 나는 뭘 해야 하지? 어디를 가야 하지? 숙소에 가방을 던져두고, 그냥 밖으로 나와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한 시간 넘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마을의 리듬에 들어간 후였습니다.

사람 대신 식물이 말을 거는 여행

이 마을은 매일 아침 주민들이 ‘잎사귀 차트’를 기록하는 것부터 하루를 시작합니다. 잎이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움직였는지, 수분 함량 변화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함께 씁니다. 저도 둘째 날부터 작은 노트를 받아 이 기록을 해보았습니다.

놀라웠던 건, 그날의 제 감정이 식물의 움직임과 묘하게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흐리고 습한 날에는 잎이 아래로 처졌고, 저 역시 조금 무기력했습니다. 맑고 바람 부는 날엔 잎이 활짝 펴졌고, 저는 이상하게도 더 자주 웃게 되었습니다.

식물은 가장 정직한 리듬을 가진 존재입니다. 인간보다 먼저 바람을 알고, 비를 먼저 감지하죠.” 이 말은 마을 코디네이터가 처음으로 제게 했던 유일한 설명이었습니다.

관광지가 아닙니다. 기념품도 없습니다. 대신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조용한 나뭇잎 마찰음과, 저녁 하늘에 서서히 사라지는 붉은빛이었습니다. 정말 이상하게도, 스마트폰을 들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진보다 더 오래 남는 감각이 저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식물과 함께하는 여행은 인간의 시간 감각을 해체시킨다

이 마을의 가장 독특한 점은 ‘시간을 해체’시키는 구조였습니다. 모든 활동은 시계나 알람이 아닌, 자연 변화에 따라 자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식사는 공동 부엌에서 원하는 시간에 직접 차려 먹고, 정해진 취침 시간도 없습니다. 해가 지면 자고, 새가 울면 깹니다.

그렇게 3일을 보내자, 신기하게도 제가 ‘시간이 없는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초조했지만, 이내 평온해졌습니다. 늘 분 단위로 움직였던 일상에서, ‘오늘이라는 날이 길게 이어지는 유기체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보통 많은 장소를 보고, 많은 것을 먹고, 무언가를 ‘채워서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여행은 비우는 여행, 시간 감각, 외부 자극, 심지어 ‘나’라는 정체성마저 한 겹씩 내려놓는 과정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어떤 사진도 남기지 않았지만, 잎사귀를 그린 작은 노트 한 권을 가방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자연의 변화와 함께 움직였던 저의 리듬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여행의 흔적이었습니다.

이제는 누가 “어디 다녀왔어?”라고 물으면, 사진 대신 식물 노트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정지된 자연 속에서, 사람은 다시 고요해지고, 그 고요 속에서 우리는 ‘시간을 경험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그곳엔 명소도 없고, 유명한 맛집도 없지만,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마을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에 지쳐 있다면, ‘무언가를 보는 여행’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엔 식물처럼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 조용히 회복되는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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