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로드트립이라고 하면 대부분 그랜드캐니언, 라스베이거스, 요세미티 같은 유명 관광지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진짜 로드트립의 매력은 '지나칠 수 있었던 곳'들에 있습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미국 서부의 깊은 매력을 보여주는 소도시와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한 제 경험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지도 앱이 추천하지 않는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작은 마을의 여운까지 모두 담은 독창적인 로드트립 코스를 지금 공개합니다.
유타의 히든 스폿,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
모두가 브라이스 캐니언이나 자이언 국립공원으로 몰리는 사이, 저는 유타 남부의 캐피톨 리프(Capitol Reef)를 선택했습니다. 이곳은 레드록 지형이 형성한 협곡과 과수원, 그리고 고요한 캠핑장으로 유명한데요, 무엇보다 사람이 적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제가 방문한 시기는 5월 초였는데, 국립공원 초입에 있는 프루타(Fruita) 지역 캠핑장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텐트를 치고 나서 과수원 산책을 하는데, 사슴 가족이 저 멀리서 조용히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인적 드문 이 공원에서,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누워 있던 그 경험은 도시에서 절대 느낄 수 없는 고요한 감동이었습니다.
하이킹 코스로는 Cassidy Arch Trail을 추천드립니다. 아치 위에 직접 서서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고, 바위 색이 시간에 따라 붉은빛에서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풍경은 자연이 그리는 예술 그 자체였습니다.
네바다의 고스트타운, 토노파에서의 하루
라스베이거스에서 요세미티를 향해 이동하던 중, 일부러 경로를 틀어 네바다 주의 토노파(Tonopah)라는 마을에 들렀습니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이곳을 지나치지만, 저는 미국 로드트립의 진짜 묘미는 이런 예상치 못한 마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노파는 1900년대 초 광산 붐을 타고 번성했던 도시로, 지금은 인구도 적고 상업 시설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엔 진짜 ‘서부’가 숨 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의 미즈파 호텔(Mizpah Hotel)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1907년에 지어진 이 호텔은 역사적 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면서, 유령이 출몰한다는 소문으로도 유명하죠.
호텔 내부는 마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가득했고, 엘리베이터도 100년 넘은 수동식이었습니다. 밤에는 로비 벽난로 앞에서 여행자들과 간단한 맥주 한 잔을 나누었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 속에서 미국 서부의 또 다른 풍경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Central Nevada Museum이 있어 광산 시대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고, 인근 사막에서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별사진을 찍기에도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 395번 도로의 숨은 보석들
많은 이들이 LA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1번 도로(해안 도로)를 선택하지만, 저는 캘리포니아 동부를 따라가는 395번 도로를 택했습니다. 이 도로는 모노호수(Mono Lake), 매머드 레이크(Mammoth Lakes), 그리고 앨라바마 힐즈(Alabama Hills) 같은 숨겨진 자연 명소로 가득합니다.
제가 가장 인상 깊게 방문한 곳은 Mobius Arch가 있는 앨라배마 힐즈였습니다. 이곳은 할리우드 서부 영화의 주요 촬영지로, 실제로 와보면 바위와 산맥이 만들어내는 장엄한 장면이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Mono Lake입니다. 소금호수 특유의 하얀 트루파(석회암 기둥)가 호수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풍경은 정말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호숫가에 서면 물안개 사이로 해가 떠오르며 그 풍경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데, 이 광경을 보며 많은 생각이 정리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395번 도로의 매력은,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아 자연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아무 준비 없이 떠나도 현지의 작은 식당과 주유소, 모텔들이 반겨주는 따뜻한 로컬 감성 덕분에 더 기억에 남는 여정이 되었죠.
미국 서부 로드트립의 진짜 매력은 사람들이 흔히 가는 곳이 아니라, 우연히 지나친 길과 예상 밖의 도시, 그리고 고요한 자연 속에 있습니다. 캐피톨 리프의 적막함, 토노파의 황량한 골목길, 그리고 395번 도로의 신비로운 새벽풍경까지. 저는 이 여정 속에서 단순한 관광이 아닌,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혹시 로드트립을 계획 중이라면, 지도에 없는 여백의 길 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