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릴 적 찍은 한 장의 가족사진. 흑백에 가까운 빛바랜 컬러와 어설픈 포즈 속에 나는 분홍색 멜빵바지를 입고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뒤엔 작은 해수욕장 간판과 어설프게 웃는 아버지. 문득 그 장소가 지금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지난 주말, 저는 사진 속 장소를 찾아 나섰습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닌, 기억을 따라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불러낸 여름의 냄새
그 사진은 집 책장 안 오래된 앨범에 꽂혀 있었습니다. 필름 특유의 질감, 90년대 말의 촌스러운 컬러톤, 엄마가 손글씨로 써놓은 "○○해수욕장, 1997"이라는 메모.
처음엔 장소를 특정하기 어려웠지만 배경 간판과 주변 풍경, 엄마의 기억에 의존해 그 해수욕장이 현재 충남 태안의 ○○해수욕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가볍게 떠나온 하루치 여행. 강렬한 목적지는 아니었지만 그 사진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대로인 것도, 달라진 것도 반가웠다
도착하자마자 처음 느낀 감정은 “아, 너무 많이 변했다…”였습니다. 사진 속 가게는 이미 없어졌고, 주변은 캠핑장과 카페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다 냄새, 조금 촘촘한 백사장 모래, 조용히 밀려드는 파도 소리는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곳에 다시 서서, 이번에는 제가 엄마의 손을 잡은 딸아이의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풍경은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에 괜히 뭉클해졌습니다.
그때는 몰랐던 장면들이 이제야 보인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도, 그날의 기억은 어렴풋했지만 지금 다시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니 당시 부모님의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왜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 웃었는지, 왜 아버지는 바다를 등지고 나를 바라봤는지, 그 모든 감정이 이제는 제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며 저는 사진을 한 장도 찍지 않았습니다. 이미 사진은 집에 있었고, 이번에는 기억을 ‘다시 살리는 일’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머물던 자리에는 여전히 따뜻한 바람이 분다
시간이 흐르면 장소는 바뀌고 사람은 변합니다. 하지만 어떤 풍경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그런 기억을 현실로 꺼내보는 용기였고, 지나간 시간을 현재의 감정으로 환기시키는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당신도 혹시, 어릴 적 가족사진 속 장소가 있다면 한 번쯤 다시 가보세요. 그곳엔 과거의 당신이, 지금의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