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간판을 따라 걷는 하루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도시의 기억을 만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 말입니다.
우리는 도시를 지나가며 무심히 수많은 표지판을 스칩니다. 길 안내, 상호명, 주의 표시, 경고 문구까지. 하지만 오래된 표지판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건 더 이상 기능이 아니라 기억이 남은 풍경이 됩니다.
어느 날 문득, 저는 도시 속 낡은 간판과 표지판만을 따라 걷는 여행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건 지도 없이 떠나는 시간여행이자, 도시가 스스로 써 내려간 기록을 읽는 여정이었습니다.
철제 간판 하나에도 시간이 흐른다
여행을 시작한 곳은 서울 을지로. 세운상가와 충무로 사이, 공구상점과 철물점들이 아직 남아 있는 그 거리에는 90년대, 아니 어쩌면 80년대식 서체와 색감의 간판들이 아직도 붙어 있습니다.
‘흥신소’, ‘대장간’, ‘문방구’ 흰색 아크릴 위에 검정 글씨만 딱 적혀 있는 낡은 표지. 지워진 전화번호와 반쯤 떨어진 네온이 말해줍니다. 이곳엔 사람들이 덧칠하지 않은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고요.
그 앞에서 저는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그냥 오래 들여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이 간판은 도대체 몇 사람의 시선을 받아왔을까?”
방향을 알려주던 표지판이 이제는 추억의 방향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은 서울 독립문역 인근. 한적한 골목길 어귀에 녹슨 철판 위에 직접 손으로 쓴 듯한 안내 표지 하나가 붙어 있었습니다. “○○빌라 →”라는 문구와 함께 작은 화살표 하나. 지금은 그 빌라조차 없어졌다는 사실을 현지 어르신께 들었습니다.
사라진 건물의 표지판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안내하는, 기억의 방향표처럼 느껴졌습니다. 표지판은 더 이상 실용성을 지니지 않지만, 누군가의 10년, 20년의 발걸음을 묵묵히 지켜본 기록이었죠.
이런 표지들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지만 누구에게는 사적인 역사이자 도시의 유산이 됩니다.
낡은 포스터 위로 덧붙여진 지금의 표정들
홍대 뒷골목으로 향했을 때, 전봇대와 골목 벽면엔 수없이 많은 포스터들이 겹겹이 붙어 있었습니다. 공연 전단, 시위 포스터, 전시회 홍보지… 그 아래에는 찢기고 벗겨진 옛 종이들이 조용히 누워 있었죠.
“2008년 5월 공연 – 자유극장” 이미 끝난 지도 오래된 공연. 하지만 그 종이 하나가 말해줍니다. 이 거리엔 누군가의 청춘이, 누군가의 첫사랑이, 누군가의 도전이 다시 붙여지고, 다시 잊히고, 다시 지나갔다고요.
표지판과 간판은 도시의 고백입니다. 바쁘게 걷다 보면 지나치지만 멈춰서 바라보면 그 도시는 무수한 문장으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안내를 위한 표지에서, 기억을 위한 표지로
낡은 표지판을 따라 걷는 여행은 정보를 얻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기억을 발견하고, 시간의 궤적을 더듬는 관찰입니다.
그 어떤 여행보다도 느리게 걷고, 사진보다 오래 바라보고, 검색보다 더 많이 상상해야 하는 여정이었지만 그래서 더 풍부했습니다.
언젠가 당신도 도시를 걷다가 어딘가 녹슬고 희미해진 간판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건 ‘지워지지 못한 역사’이며, 당신을 위한 조용한 안내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