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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여행 (트라우마, 힐링여행, 심리회복)

by love6967 2025.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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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토닌, 호르몬, 행복 이미지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날까요? 단지 풍경을 보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잊기 위해서? 혹은 다시 기억하기 위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상실과 무력감의 시간을 여행을 통해 회복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단순한 ‘힐링 여행’이 아닌, 트라우마 이후 마음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여행이 어떤 의미로 작동하는지를 한 사람의 진심 어린 여정을 통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이 글은 ‘여행 후기’가 아닌, ‘여행이라는 방식으로 나를 되살린 기록’입니다.

트라우마 이후, 내가 바라본 세상은 흑백이었다

2000년 겨울, 저는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잃었습니다. 병원, 장례식장, 냉정한 문서작업들. 모든 과정은 너무 빠르고, 제 감정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TV는 켜져 있었고, 밥은 먹었고, 일도 했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했습니다. 아침이 오면 숨은 쉬어졌지만, 사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습니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고, 약도 복용했지만 뭔가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갔던 남해의 바다 사진이 폴더 속에서 우연히 튀어나왔습니다. 그 사진 속엔, 지금은 없는 아버지와, 그 곁에 웃고 있던 저도 있었습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습니다. “한 번, 그 바다로 다시 가보면 어떨까?”

남해 바다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남해는 겨울 바다치 곤 따뜻했습니다. 파란 하늘과 투명한 파도가 마을 가까이까지 밀려와 있었고, 사람이 거의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이곳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에 체크인한 후, 근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 먹고 그대로 바닷가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요. 바람에 모래가 바지에 닿는 느낌, 파도 소리의 리듬, 저 멀리 보이는 낚싯배의 점. 그 모든 것이 말

없이 나를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슬퍼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그저 아버지가 봤던 풍경을, 나도 그대로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밤, 저는 그 바닷가 근처 찻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와 잠깐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잊는 건 말처럼 안 돼요.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둬도 돼요. 그 자리에 머물다 보면… 언젠가는요.”

그 말은 마치 이 여행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 같았습니다. 잊으려고 하지 말고, 고치려 하지 말고, 그냥 그 상태로 내 감정도 잠시 ‘여행’시키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그렇게 둘째 날엔 혼자 바닷가를 걸었고, 마지막 날엔 작은 카페에 앉아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였지만, 사실은 제 자신에게 쓰는 말이었습니다.

여행은 기억을 덮는 게 아니라, ‘다시 읽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흔히 여행을 통해 ‘모든 걸 잊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여행을 통해 오히려 기억을 덮지 않고, 다시 꺼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여행은 마치 먼지 쌓인 서랍을 조심스럽게 여는 일입니다. 거기에 무엇이 들었든, 그것과 마주하지 않으면 우린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노출치료(Exposure Therap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에게 관련 기억을 안전한 공간에서 다시 경험하게 하는 치료 방식입니다. 제가 남해에서 겪은 시간은 어쩌면 여행이라는 이름을 한 자가치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바다를 다시 보고, 기억을 다시 읽고, 내 감정이 어떤지도 다시 느끼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강요 없이, 자연스럽게요.

그 후로 저는 매년 겨울, 어디든 짧은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도 없고, 계획도 없습니다. 단지 그해의 나와 조용히 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아마 말 못 할 트라우마나 상실을 안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모든 치유가 여행을 통해 이뤄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감정은 말보다 공간이 더 잘 어루만집니다. 특히 조용한 여행, 계획이 없는 여행, 의미를 찾지 않아도 괜찮은 여행. 그런 여행은 우리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줍니다. 그저 살아 있다는 것, 걷고 있다는 것,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는 걸요. 혹시 지금 그런 위로가 필요한 시기라면, 지도 어딘가 한 구석에 점 하나 찍어보세요. 그 점이, 당신 마음의 쉼표가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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